바람에 맞서 걸어본 적 있나요? 오늘 일어나서 마주한 풍경은 무엇이었나요? 저는 지금 비 오는 산중의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어째서 경치를 의미하는 '풍경(風景)'이라는 단어에 '바람(風)'이라는 한자가 들어가 있을까요? 중요하지 않은 일일지도 모르지만, 이것이 때때로 궁금했습니다.
나무와 풀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바다와 강이 바람에 출렁이는 모습에 우리는 그들의 존재를 뒤늦게 기억해 내곤 합니다. 바람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자연의 변화가 바로 풍경인가 봅니다. 풍경은 언제나 흐르고, 우리는 그런 흐름 속에서 각자의 모습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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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다은
정다은은 파란 선으로 단순한 풍경을 그리는 동양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다. 서울대학교 동양화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밟고 있다. 개인전 『새들의 여행』(마롱197, 2021)과 『곳』(파소 갤러리, 2022)을 열었으며, 『새새계』(우석 갤러리, 2023), 『포스터 덤프』(그라운드시소 성수, 2023) 등의 단체전에 참여하며 활발한 작업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단순하면서도 다채로운 듯한 그의 풍경 그림으로 ‘윤딴딴’ ‘진우철’ 등 국내 뮤지션과의 앨범 아트 작업,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내의 일러스트 작업, 네이버, 삼성전자, 스타필드, 토요타 코리아 같은 국내외 브랜드와의 협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러브콜을 받고 있다. 기억 속 풍경을 온전한 자신의 리듬으로 그려낸 그의 그림은 보는 사람의 마음에 새로운 박자를 부여한다. 복잡한 인생을 단순하게 살고 싶은 마음인 그는 지금도 한 마리 새가 되어 유연히 어딘가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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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첫 그림을 기억하나요?
학부 졸업 전시 작품이 제 첫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때도 지금과 똑같은 주제로 제주 풍경을 그렸어요. 나는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하나 고민하던 시기였어요. 작품 구상을 하는데 어느 순간 내가 ‘사람들에게 멋있어 보이는 것’을 염두에 두고 그림을 그린다는 걸 깨달았어요. 이렇게 그린 그림은 가짜고, 나답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멋있지 않아도 괜찮고 약간 어설퍼도 괜찮으니까 나에게 솔직한 그림을 그려보자고 다짐했어요.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장면을 끄집어내어 그림을 그린다면, 그때의 나를 돌아보기도 하면서 솔직한 그림을 그릴 수 있겠더라고요. 가끔씩 혼자 훌쩍 제주도로 떠나곤 했었는데, 제주도에서 봤던 장면을 그림으로 옮기기 시작했어요. 첫 작품에는 지금처럼 파란색 선도 명확한 형체도 없었어요. 이제는 제가 뭘 그려야 할지, 어떤 이미지를 그리고 싶은지가 좀 뚜렷해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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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다은, 「말린 기억_ sunrise and sunset」, 2017, 한지에 채색, 100 × 400 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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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정말로 그림에 파란색 선으로 그려진 틀이 항상 있네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저는 풍경을 그려요. 사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게 풍경인데, 그림은 이렇게 한 장면만 포착해서 임의의 칸으로 잘랐다고 보시면 돼요. 파란색 선은 만화의 칸에서 차용했어요. 만화는 평면적인 예술이라서, 평면적이고 단순한 제 그림을 극대화할 수 있는 장치가 되기도 해요. 화판 자체가 네모난 칸이기도 하지만, 거기에 제가 한 번 더 선을 그어서 이 외곽선을 분명히 하고 그 안에 평면으로 그림을 그렸다는 의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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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다은, 「흐린 바다」, 2022, 한지에 색연필, 채색, 50×10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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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풍경을 포착할 때 어떤 걸 특별히 신경 쓰나요?
색깔.
어째서 색깔인가요?
그러게요. 어째서 색깔일까? 풍경에는 감정도 같이 녹아들 때가 많은데 그때 가장 효과적으로 감정을 표현해 주는 것이 색깔이에요. 여러 색을 조합해서 따뜻하거나 차가운 감정을 표현할 수 있도록 신경 쓰고 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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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다은, 「밤공기」, 2023, 한지에 색연필, 채색, 50 × 50 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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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만 봐도 새가 등장하고, 어떤 때는 새의 시선으로 그림을 그린다고도 하셨는데요. 작가님과 새는 어떤 관계인지 궁금하네요.
네,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어요. 아톰은 텐마 박사가 자식인 토비오가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 그 상실감을 채우려고 만든 기계잖아요. 그 자체로 유한한 것에 대한 비통함이 있죠. 어렸을 때부터 아톰의 그런 배경을 좋아했어요. 감동도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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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집에 틀어박혀서 그림만 그리던 때 이 새가 탄생했어요. 스타트업에 잠깐 다녔다가 퇴사하고 다시 작업을 하려고 했는데 최대한 돈을 아끼려고 집에만 있었어요. 열심히 좋은 작업을 해서 훨훨 날고 싶다는 의미와 저 자신도 자유롭게 밖을 돌아다니고 싶다는 마음이 투영되어서 만들어졌죠. 그래서 새는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던, 즉 저 자신이 되고 싶던 존재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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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다은의 새는 작가 본인이자 지향하는 자유로움을 대변하는 존재다. 방문했던 공간을 재해석하여 그려낸 장면들은 한 세계의 다른 풍경이 된다. 작가는 자신이 삶을 살아온 방식들을 이미지로 바꿔 작업에 투영하고, 이상적인 세계를 향유하는 새의 모습과 그러한 새의 시점에서 바라본 정경이 나타난다.
전하루, 「기획의 글」, 『새새계』 (서울: 우석갤러리,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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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묘사하면 그 새의 생김새나 종을 특정할 수 있을까요?
아니요. 그냥 관념적인 새예요. 사실 이 새가 어떤 종류인지 물어보는 사람들이 많아서 더 다양한 새를 그려보면 어떨지 고민했던 적이 있어요. 그래서 저한테 어울리는 새를 생각하다 올빼미를 한번 그려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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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다은, 「새들의 여행」을 위한 드로잉 1, 20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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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다르네요, 지금의 생김새랑.
사실 모두가 기겁해서 다시는 올빼미를 그리지 않아요.
자칫 삼각형에서 역삼각형이 될 뻔했네요.
그러니까요. 아, 웃겨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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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자연에서 무력감과 경외감을 느낀다고도 하셨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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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커다랗고 힘이 센 자연을 바라보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과 경외감을 동시에 느낀다. 살아가기 위한 사소한 고민은 잠시 잊고 나에게 오롯이 집중한다. 나는 매우 조그만 존재라는 것을 느끼며 오히려 안도한다. 자연스럽게 있는 것들—바다와 산, 물과 바람은 세상을 내 마음대로 어떻게 해보겠다는 오만을 깨부수며 때론 그냥 흘려보내야 할 때도 있어야 한다는 여유를 알려준다. 해가 질 무렵, 나를 둘러싼 공간을 물들이는 노을의 색은 나의 머릿속에 생각할 틈을 열어준다. 노란색 하늘을 바라보며 내 마음도 아름다운 색을 가지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정다은, 작가 노트 중 일부, 2022, https://yamchelip.com/n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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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사려니숲길을 횡단하겠다는 다짐을 품고 갔는데 길이 정말 길더라고요. 시작이 늦어서인지 중간 정도 지났을 때 해가 지기 시작했어요. 사람들이 점점 없어지고, 딱따구리 소리가 양옆으로 들리고, 까마귀랑 사슴이 왔다 갔다 했어요. 그 순간 정말 무서워서 어둑해지기 직전에 무작정 뛰어서 숲길을 빠져나왔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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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처음으로 생존 본능을 느꼈어요. 이후에도 자연에 가면 비슷한 경험을 종종 겪어요. 오히려 살아 있다는 걸 느껴요. 사실 도시는 너무 편리한 곳이어서 그런 원초적인 위협을 느끼기 어렵잖아요. 바닷바람이 많이 부는 곳에서는 바람을 밀면서 걸어가야 하는 것처럼 자연에서는 자연과 직접적으로 부딪히는 일이 많아요. 그러면 머릿속엔 난 살아야겠다는 생각만 들면서 한편으로는 ‘나는 그냥 작은 인간일 뿐이구나.’ 하고 느끼죠.
그러면 도시에서 잘 안됐던 것들은 막상 자연에 오면 큰 문제가 아니게 되더라고요. 결국은 그렇게 더 본질적인 문제들에 집중하게 되고, 그러면서 무력감과 경외감을 느끼는 것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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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작가님을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무엇인가요?
고민을 많이 하게 되는 질문이었는데 외적인 면에서 저를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건 없는 것 같아요. 결국에는 나 자신이 나를 단단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결국 이것도 나르시시즘의 끝판왕이라 할 수 있겠네요.(웃음)
저는 사소한 다짐을 많이 해요. 예를 들어 ‘겁나 끝내주는 전시를 하겠어.’라는 다짐보다는 ‘오늘은 드로잉 하나 하기’ 같은 작은 목표를 만들고 이루면 성취감이 생겨요. 그런 원동력으로 계속 나아가요. 사소한 목표를 세우고, 성취한 걸 기록하고, 다시 그 기록을 보고. 그게 계속 이어지면 단단한 내가 되는 것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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