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은 지금 어떤 사람인가요? 비즈니스의 측면에서 디자인은 일반적으로 콘텐츠를 제공하는 클라이언트가 필요한 일입니다. 콘텐츠 없이, 클라이언트 없이, 나아가 마감 없이 시작한 디자인은 '개인 작업'이라는 해시태그와 함께 끝없이 덜컹거리거나 흐지부지 끝나기 십상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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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지 방랑하는 듯 보이는 이 ‘개인 작업’은 어디론가 무작정 떠나는 여행을 닮은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럼 말이 나온 김에, 여행의 측면에서 디자인은 어떨까요? 사실 콘텐츠도, 클라이언트도, 마감일도 전부 없어도 괜찮습니다. 그 나름대로 장점이자 낭만이 될 수 있죠. ‘개인 작업’은 더 이상 갈 곳 잃은 디자인이 아니라 꾸준히 전진하며 끝없는 가능성을 열어주는 디자인이 됩니다. 어쩌면 ‘개인 작업’과 여행은 천생연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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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
'느린 여행'을 통해 '자신만의 트랙과 속도'를 찾는 여행 크리에이터. 이베이 코리아와 브랜드 컨설턴시인 클레이에서 브랜드 디자이너로 일했다. 2023년 회사를 떠나 '씽씽이'로 부르는 무동력 킥보드만으로 일본, 베트남, 타이완을 종주했다. 여기에 더해 '후지산 샌들 등정' '미니벨로 국토 종주' '제로포인트트레일 설악 완주' '강화나들길 전 구간 트레킹' 등의 느린 여행을 실천했다. 우연한 기회로 시작한 유튜브를 통해 여행을 디자인하는 방식을 사람들과 나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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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팎』의 사소한 첫 번째 질문이에요. ‘꾸준’으로 활동하기 이전의 생활이 궁금합니다. 브랜드 디자이너로 일하셨는데, 특히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가 있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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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후 이베이 코리아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어요. 이후 브랜드 컨설턴시인 클레이에서 여러 브랜딩 프로젝트에 참여했고요. 특히 우아한형제들의 ‘배달의민족’ 브랜드 리뉴얼, 비바리퍼블리카의 ‘토스뱅크’ 브랜드 아이덴티티 및 카드 디자인, 샌드박스스퀘어의 ‘키친마이야르’ 브랜딩 및 디자인, 네이버의 ‘데이터센터 각 세종’ 브랜딩 및 사이니지 디자인 등이 기억에 남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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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적인 월급이 담보된 직장을 그만둔 까닭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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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때문이죠. 물론 크고 작은 여러 이유가 있지만, 불필요한 잔가지를 쳐내면 여행만 남는 것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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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씽씽이’로 부르는 무동력 킥보드만으로 타이완과 베트남을 종주했고, 최근에는 후쿠오카를 시작으로 홋카이도까지 일본을 종주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킥보드였나요? 그것도 무동력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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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때 무동력 킥보드를 타고 통학했어요. 자취방에서 캠퍼스까지 가는 길이 걷기에는 조금 멀고, 그렇다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기에는 가까운 거리였거든요. 처음에는 자전거를 탈까 고민했는데, 제게는 너무 크고 자취방에 세워 둘 곳도 마땅치 않았죠. 자전거도 부담스러울 만큼 기계치이기도 하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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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시간짜리 전공 수업에 들어간 어느 날이었는데, 그날따라 수업이 정말 듣기 싫었어요. 한 시간 정도 앉아 있다가 킥보드를 들고 강의실을 몰래 빠져나왔죠. 그리고 킥보드를 타고 학교 근처 강가를 따라 20킬로미터 정도를 이리저리 돌아다녔어요. 그게 제 킥보드 여행의 시작이라면 시작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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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신카이 마코토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 같은데요? 원래 여행을 좋아했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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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이 되면 실천하고픈 첫 번째 계획이 세계 여행이었고, 대학 생활 내내 여름 방학에는 아르바이트를, 겨울 방학에는 세계 여행을 다닐 만큼 여행에 진심이었어요. 물론 지금도 그렇고요. 그렇게 여행한 나라를 꼽으면 열 손가락이 모자랍니다. 졸업한 뒤에 직장인 생활이 시작됐고, 여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팬데믹이 몇 년 동안 지속된 탓에 세계 여행은 꿈도 못 꿨죠. 그러다 팬데믹이 끝나는 조짐이 보이기 시작할 무렵 바로 여행 계획을 세웠어요. 마침 나이도 스물아홉이었고, 20대의 마지막 1년을 온전히 나만의 방식으로 여행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죠. 누군가에게는 무모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렇게 지금까지 9개월 정도 킥보드를 타고 세계 곳곳을 천천히 누비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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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 님의 여행은 그 자체로 ‘여행을 디자인하는’ 과정이자 방식처럼 보이기도 해요. 어떤 측면에서 디자인은 수많은 변수를 고려해 규칙을 만들고 따르는 일입니다. 여행을 디자인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몇 가지 규칙이 만들어졌을 것 같은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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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그때 혼자 만들고, 혼자 따르고, 혼자 수정하는 규칙이다 보니 따로 문서화하지는 못했어요. 다만 그 규칙을 만들고, 따르고, 수정하는 과정의 중심에는 쉽게 수정하지 않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마음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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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00만 원으로 1년 동안의 여행을 무사히 마무리하자.
- 세상은 좁다. 언제 어디서 이 사람을 또 만날지 모른다.
- 다음에 또 오면 된다. 지금 모든 걸 경험하려 하지 말자. 아쉬움을 남기는 것도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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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6만 원이라는 빠듯한 예산으로 임하는 여행에서 유명 관광지는 입장료가 비싸서 못 들어갈지언정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여행자에게 사는 맥줏값은 아끼지 않습니다. 유명 관광지는 다음에 또 오면 되지만 당장 내 앞에 있는 이 사람은 다시 못 만날 가능성이 크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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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구독자 4,000여 명 가운데 꾸준 님과 비슷한 방식으로 여행을 꿈꾸는 분들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도 그 가운데 한 명일 테고요. 그들에게 건넬 만한 유용한 팁이나 주의 사항이 있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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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여행은 넓게는 ‘느린 여행’이고, 좁게는 ‘킥보드 여행’입니다. 특히 ‘느린 여행’은 이 대화를 읽는 모든 분께 추천하고 싶어요. 느린 여행을 통해 천천히 세상을 관찰하다 보면 자신만의 트랙과 속도를 찾게 됩니다. 그리고 이는 생활에도 고스란히 적용되리라 믿습니다. 같은 트랙 위에서 다른 사람과 경쟁하는 게 아닌 나만의 트랙에서 나만의 속도로 살아가는 거죠. 반드시 해외로 나가거나 멀리 떠나지 않더라도 당장 오늘 퇴근길에 천천히 여기저기를 둘러보는 게 느린 여행의 시작이자 자신만의 트랙과 속도를 찾는 과정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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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경험상 킥보드는 안전이 확보된 단거리 여행에 적합합니다. 저는 도시와 도시를 킥보드로 이동하는데, 교통사고뿐 아니라 인적이 뜸한 시골에서는 생각지 못한 야생동물 등 위험 요소가 적지 않거든요. 킥보드는 자전거보다 휴대성이 좋고, 걷는 것보다 빠르기 때문에 제한된 시간 안에 더 다양한 곳을 둘러볼 수 있죠. 물론 이따금 바퀴가 다 닳아서 교체해야 할 때도 있어요. 하지만 바퀴가 자전거처럼 튜브가 아니기 때문에 훨씬 간편하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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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디자이너는 대개 스크린에서 1픽셀 단위로 씨름하곤 합니다. 그런 경험 탓에 오히려 영상을 만드는 데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예컨대 0.125초 때문에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한다거나 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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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뭣이 중헌디.” 영화 『곡성』의 명대사 가운데 하나입니다. 디자이너만 아는 세부에 지나치게 집착하느라 훨씬 중요한 걸 놓친 경험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늘 되뇌이는 말이기도 하고요. 특히 브랜드 컨설턴시에서 일하는 동안 세상은 정말 넓고, 여행하는 동안 디자인이 전부가 아니라는, 어쩌면 당연한 사실을 깨달았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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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세부에 집작하는 건 일과 욕망 사이에서 늘 범하는 실수죠. 자연스럽게 디자인을 대하는 태도 또한 바뀌었을 것 같은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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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전에는 디자이너의 관점으로 모든 걸 디자인만으로 판단해왔지만, 이제 디자인은 제가 활용할 수 있는 여러 관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영상을 기획하고 만들 때도 마찬가지고요. 디자이너로서의 태도는 최대한 내려놓으려 해요. ‘이 영상을 누가 볼까?’ ‘침대에 누워서 볼까?’ ‘출퇴근길에 지하철에서 볼까?’ 자연스럽게 소비자, 즉 제 영상을 보실 분들의 관점을 계속 생각하게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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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시골 130년 된 집에서 고양이랑 자고 반딧불이 본 하루 [씽씽이 일본 종주 EP.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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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월여의 일본 종주가 끝났습니다. 축하도 축하지만, 다음 여행지가 궁금합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어떤 규칙이 추가될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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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화가 『안팎』에 소개될 때쯤 저는 태국 어딘가에 있을 것 같아요. 치앙마이, 방콕, 푸켓 같은 관광지를 벗어나 작은 마을들을 구석구석, 그리고 느리게 돌아볼 생각입니다. 이번에는 아무래도 열대우림 기후에서 살아남기 위한 규칙이 몇 개 추가될 것 같아요. 일단 가서 경험해봐야 알 수 있겠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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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안팎』은 어떠셨나요? 크든 작든 『안팎』은 여러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안팎』에서 대화를 나눌 만한 사람이 있다면 언제든 말씀해주세요. 『안팎』은 언제나 여러분의 관심을 기다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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