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의 일과 생활은 어떻게 다른가요? 서점에서 미술 관련 서적을 살피다 보면 ‘관찰과 표현’이라는 문구가 심심치 않게 등장합니다. 누군가에겐 너무 익숙해서 그다지 새롭게 느껴지는 단어도 아니죠. 그런데 정말, ‘관찰’과 ‘표현’이란 무엇일까요? 일본의 현대미술가 아카세가와 겐페이는 그의 저서 『사각형의 역사』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눈은 머리의 입구라서 사물도 풍경도 모두 통과한다. 그러나 본다는 것은 눈으로 통과한 것을 머리가 포착한다는 뜻이다. 즉, 인식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볼 수 있다”
관찰의 사전적 정의는 ‘사물이나 현상을 주의하여 자세히 살펴보는 것’입니다. 표현은 관찰의 자연스러운 결과겠지요. 결국 '관찰과 표현'이란 일상의 모든 대상을 주의 깊게 잘 살펴보는 것, 본 것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 그리고 마침내 자신만의 가공법을 찾아내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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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길종
길종상가와 가공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때때로 박가공이라고도 불린다. 이하 구구절절한 설명과 의미 없는 약력 소개를 지양하는 그를 본받아 자세한 설명은 길종상가 웹사이트에 있는 짤막한 소개 글로 갈음한다. “길종상가는 상가에 입점한 사람들이 살아오면서 배우고 느끼고 겪어온 모든 것을 이용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필요한 물건이나 인력, 그 외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에 대해 적절한 금액을 받아 지속적으로 운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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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사실 이번 대화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길종상가의 '카테고리'를 정하기 어려웠어요. 필요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요. 길종 님은 주로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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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길종상가의 박길종입니다’라고 소개하곤 해요. 뭐 하시는 분이냐고 물으면 ’이것저것 한다’고 대답하고요. 작업 분야가 넓은 편이라 미술 계열 작업인지 공간 디자인 작업인지 혹은 그 외 작업인지에 따라 관련 프로젝트들을 보여주며 그때그때 다르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만나는 분들 역시 저에게 요구하는 작업의 방향이 다 다르기도 하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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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그늘, 휴거』 기획: 현시원, 그래픽 디자인: 신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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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종 님은 혹시 평소에 거두절미하시는 편인가요? 지난 8월 시청각 랩(AVP lab)에서 진행한 개인전 <여름 그늘, 휴거> 전시 리플릿에도 일반적인 작가 소개 글은 보이지 않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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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서문은 시청각 랩의 큐레이터 현시원 님이 써주셨어요. 보통은 리플릿에 작가 소개를 본인이 직접 쓰거나 혹은 ‘몇 년도 출생, 어느 대학 졸업, 어떤 전공, 어디 어디에서 전시를 했는지’와 같은 기본적인 내용이 들어가잖아요. 근데 저는 ‘굳이 써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의미 없다고 느끼거든요. 리플릿에 들어가는 작품 설명도 사실 내부 공유용으로 간단하게 쓴 거였는데 ‘이거 좋다, 재밌다’는 반응이어서 결국 드로잉과 함께 들어갔죠. 전시 서문에는 제 글이 “하이쿠 같다”라는 표현도 있어요. 평소에도 긴 설명을 그렇게 좋아하진 않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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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입구의 <팔방풍>이 관람객을 구원했어요. 올해 8월은 유독 더웠고, 오르막길을 오른 터라 힘들었거든요. 입구에 들어서자 길종 님이 직접 선풍기도 틀어주시고 간단한 안내도 해주셨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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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각 랩으로 가는 언덕길이 한 100미터 가까이 되거든요.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오시면 입구에서 바람 좀 쐬다가 들어가시라고 안내했어요. 차례로 들어오셔서 <전시 보행기>도 타보고 작품도 만져보고 리플릿에 적힌 작품 설명을 보면서 웃기도 하고. 그런 장면들을 보는 게 굉장히 좋았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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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길종의 ‘가공’에는 어딘지 농담 같은 유머가 늘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길종 님은 유머 있는 사람인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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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굴 웃기거나 말을 재밌게 하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낯을 가리기도 하고 농담도 잘 안 하고요. 그래서 오히려 작품에서 재미있는 점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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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에서는 유독 박길종의 ‘관찰자 시점’이 잘 느껴졌어요. 평소에 관찰하는 것을 즐기시는 편인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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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을 할 때도 그렇고 출장을 가도 그렇고, 굉장히 두리번거리는 편이에요.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저 건물 끝에 뭐가 달려 있네. 뭐지?’ 이런 식이죠. 주변 사물을 관찰하는 걸 워낙 좋아해요. 오래된 주택의 벽이나 지붕에 주인이 직접 무언갈 덧대고 수리한 흔적들도 재밌고, 주차장 팻말이나 고깔도 되게 다양하잖아요. 그런 대상을 모두 사진으로 남겨두죠. 길종상가 초기에는 웹사이트의 ‘걷다 사진관' 폴더에 그 기록을 아카이빙 해두기도 했어요. 지금은 박가공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리는 정도로 변화했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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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종상가의 ‘처음’에 대한 이야기도 궁금해요. 첫 시작, 첫 프로젝트 같은 것들 말이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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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도 하반기에 ‘길종상가’라는 이름을 만들었어요. 제가 낙원상가나 세운상가 같은 상가 유형을 좋아하거든요. 상가 안에는 여러 상점이 있고, 그 상점들은 유지될 수도 있고 누군가가 새로 들어오고 나가면서 계속 바뀔 수도 있잖아요. 그런 것처럼 제가 하는 일도 바뀔 수 있고 또 잘 안되면 업종을 바꾸자고 생각할 수도 있고. 이 모든 걸 포괄할 수 있는 이름이라고 생각했어요. 거기에 제 이름을 앞에 걸면 사람들이 믿고 맡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죠. 왜, 종종 식당에 사장님의 이름과 사진을 걸기도 하잖아요. 지금은 길종상가에 입점한 상점 ‘가공소’를 운영하고 있어요. 원래 이름은 ‘목공소’였는데 그러면 나무로 된 작업만 할 것 같아서 좀 더 많은 영역의 작업을 포괄할 수 있도록 ‘가공소’라고 바꿨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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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공’이라는 단어가 딱 적합한 것 같아요. 을지로에도 여기저기 가공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더라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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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공의 인물이다’라는 말도 하잖아요. 물건을 ‘가공한다’의 가공도 있고요. 두 가지 의미를 모두 가지고 있어요. 제 인스타그램 아이디도 ‘박가공’으로 되어 있는데, 누군가에게 저를 소개할 때 “길종상가의 박길종입니다”라고 하려니까 좀 부끄러웠거든요. 박가공으로 바꾼 후로는 가끔 농담도 해요. “박길종 대표님은 사무실에 계시고 제가 대신 나와서 작업하고 있어요”라고요.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데도 일부러 그렇게 얘기하는 거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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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길종 님은 유머 있는 사람이 맞는 것 같아요. 동심도 가지고 계신 것 같고요. 어릴 때도 관찰하는 걸 즐겨 하셨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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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던 것 같아요. 만화책을 보더라도 그림이나 텍스트, 펜 선 같은 걸 하나하나 보는 편이었죠. 그래서 만화책 읽는 속도가 느렸어요. 친구가 1권 보고 있고 제가 2권을 보고 있으면 늘 친구가 닦달했죠. 아직도 보고 있냐고요. 어릴 때는 만화가가 꿈이었던 적도 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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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인터뷰 중에 “아침 9시에 일을 시작해서 저녁 6시에 끝내는 루틴을 만들고 싶다”라는 이야기를 한 적 있어요. 루틴은 잘 지켜지고 있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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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걸 지킨지는 이미 꽤 오래됐어요. 처음에는 시간도 중구난방으로, 주말도 없이 일하곤 했는데 저를 포함해서 같이 일하는 친구들, 클라이언트까지 모두의 만족을 위해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하고 주말에는 쉬고 있어요. 회사 다니는 분들에게는 기본이겠지만, 프리랜서들은 규칙적으로 시간을 정해서 일하는 게 쉽지 않거든요. 근데 막상 해보니까 모두들 그렇게 하는 이유가 있더라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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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말하는 워라밸 때문일까 생각했어요. 길종 님은 일과 자아를 잘 분리하는 편인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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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분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어요. 자연스럽게 그냥 내버려 두죠. 가끔 어떤 사람들은 어디서 영감을 얻는지에 대한 질문을 하는데, 사실 영감이라는 게 어디서 갑자기 툭 떨어지는 건 아니잖아요. 늘 어떤 대상을 관찰하고 보고 듣고 생각하다가 어느 날 샤워하는데 ‘아, 맞다. 그건 이렇게 하면 좋겠다’ 하고 문득 떠오르는 거죠. 혹은 영화를 보다가 어떤 장면에서 ‘어, 저 소품 예쁜데 다른 식으로 풀어보면 어떨까?’ 하며 아이디어가 생각나기도 하고요. 저는 일과 생활이 분리되어 있지 않고 늘 가느다란 실처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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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의 작업 중 하나만을 꼽아 소개한다면 어떤 것일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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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늘 최근 작업을 소개하는 편이에요. 그간의 시간 끝에 나온 가장 가까운 작업물이니까요. 최근에 한 작업은 경기도 이천에 있는 LP바 <근정전>의 공간 디자인인데, 사장님은 제가 좋아하는 동생이자 길종상가에서 잠시 일했던 동료기도 해요. 공간 전체의 형태들은 LP와 관련이 많습니다. 레코드판의 원형을 무대로 삼고 커버에서 꺼내는 모습에 착안해서 반원 형태의 책상과 선반을 만드는 그런 컨셉이죠. 정사각형의 LP 자켓이 반복되는 것처럼 천장과 바닥 타일 카펫, 테이블에서도 사각형의 형태가 반복돼요. 심지어는 간판도요. 또 벽면에 있는 구불구불한 선은 레코드판 표면의 소리 골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발견할 수 있는 얇은 선을 표현한 거예요. 넓어졌다 좁아졌다 하는 파장의 모양이 불규칙한데, 그걸 확대해서 패턴으로 활용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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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딱히 없어요. 서양화 전공이라 가구 디자이너나 공간 디자이너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요. 왜, 유명한 디자이너의 계보나 이론 같은 것들이 있잖아요. 그런 걸 찾아보는 타입은 아니에요. 그냥 지나가다가 ‘저거 되게 괜찮아 보인다’ 해서 찾아보면 ‘아, 그 사람이구나. 많이 들어본 이름이네’ 하긴 하죠. 근데 그 사람의 영향을 받았다거나 그렇진 않아요. 그냥 한 명씩, 하나씩 자연스럽게 알아가는 편이에요. 각 잡고 앉아서 공부하려면 어렵고 재미없잖아요. 근데 흥미가 생겨서 갑자기 찾아보게 되면 그건 또 재밌거든요. 그런 식인 것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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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도에 시작해 12년가량의 시간이 지났네요. 길종상가에서 가공소까지, 변화가 있다면 어떤 점일까요? 2023년의 길종상가는 어떤 고민과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도 궁금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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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미래를 계획하는 편은 아니에요. 처음 시작할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이렇게 될 줄 몰랐거든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길종상가’라는 이름을 짓고 가볍게 시작했어요. 하다 보니까 의뢰가 들어오고 일의 영역도 더 확장된 거죠. 그래서 저는 이제껏 그래왔던 것처럼 지금 하는 일을 잘 수행하고, 또 결과물을 충실하게 만들어내면 자연스럽게 그다음 일이 흘러갈 거라고 생각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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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종상가 2021』(화원, 2022) 편집, 기획: 이미지, 그래픽 디자인: 신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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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좋아하는 재료나 흥미롭다고 생각하는 재료가 따로 있으신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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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딱히 없어요. 한 가지 재료를 끝까지 파고 탐구하는 디자이너도 있지만 저는 그런 타입은 아닌 것 같아요. 재료가 매번 새로울 수는 없고 그보다는 디자인과 재료, 아이디어를 상황에 맞게 적절히 구성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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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질문이에요. 지난 8월 말 하늘에 슈퍼 블루문이 떴어요. 소원을 비셨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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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아내와 강아지랑 산책하면서 봤어요. 아내가 곧 운전을 시작할 텐데 거의 장롱면허거든요. 그래서 아내가 운전을 안전하게 잘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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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때부터 사용한 캐비닛과 당시 붙여놓은 이미지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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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안팎』은 어떠셨나요? 크든 작든 『안팎』은 여러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안팎』에서 대화를 나눌 만한 사람이 있다면 언제든 말씀해주세요. 『안팎』은 언제나 여러분의 관심을 기다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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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그라픽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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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 안그라픽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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