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 삶의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때로는 끓어오르는 열정보다 강력한 동력은 거부감이 들지 않는 마음인 것 같습니다. 폭발적인 추진력보다는 진득하고 은은하게 마지막까지 끌고가는 지구력 같은 것 말이에요.
거부감이 들지 않는 문장도 어떤 조치를 취하기도 전에 어느새 우리 마음속으로 미끄러져 들어와 자리를 잡습니다. 하지만 우리 앞에 당도하는 타지의 문장들은 반드시 번역가라는 매개를 거쳐 마음속에 스며들지요.
번역은 한국어를 “세밀하게 나눠서 재조립하는 과정“입니다. 두 언어 사이를 오가며 한국어의 민낯을 마주하는 순간만큼 번역가보다 한국어에 몰두하는 사람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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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태욱
송태욱은 일본어를 한국어로 옮기는 번역가다. 연세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도쿄외국어대학 연구원을 지냈으며 현재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르네상스인 김승옥』(공저)을 집필했고, 나쓰메 소세키 전집, 『십자군 이야기』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선집』 『형태의 탄생』 『점·선·면』 『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 등 셀 수 없이 많은 책을 옮겼다. 나쓰메 소세키 전집으로 한국출판문화상 번역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거부감이 들지 않아서, 싫지 않아서, 우연같지 않은 우연으로 번역가의 길을 걷기 시작해 지금도 언어를 다루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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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국문학을 전공해 석사 학위를 취득하신 뒤 박사과정 때 도쿄외국어대학교에서 연구원을 지내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국어에서 외국어로 활동 범위를 넓힌 이유는 무엇인가요?
활동 범위를 넓힌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연세대 국문과와 도쿄외대 조선어과(현 한국어학과) 사이에 교류가 있었어요. 문부성에서 장학금이 나와 그냥 지원했는데 일반적으로 학번순으로 뽑히는 거라 안 될 줄 알았어요. 그때는 광복 50주년으로, 아주 특별한 해여서 세 명을 뽑는 바람에 얼떨결에 뽑히게 된 겁니다. 장학금 준다고 하니까 그냥 갔다 오자는 느낌이었어요. 그러니까 우연히 그렇게 된 거라고 해야겠지요.
언어가 그리 큰 장벽의 존재는 아니었던 건가요?
아뇨, 큰 장벽입니다. 지금도 그렇고요.
외국어와 관련된 수많은 작업 중 번역에 적을 두신 이유가 있나요?
저도 이런 질문을 스스로한테 하는데, 결과적으로는 성격과 맞는 일이어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게 가장 큰 이유인 것 같아요. 그냥 끌리는 거 있잖아요. ‘할 수 있겠다’는 생각. 거부감 같은 게 전혀 없었습니다. 일본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우연이라고는 했지만 사실 그전에 관심이 있었을 겁니다. 일본 작가의 소설도 좋아했고요. 그리고 일본에서 유학 온 학생들과 친하게 지내기도 한 것 같습니다. 뭐, 그런 것들이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요. 도쿄외대 지원서도 선뜻 내기 힘들었을 텐데 결국 낸 걸 보면 어딘가 관심이 있었던 것 것 같습니다. 우연이지만 뭔가 준비가 돼 있었겠지요.
어떤 사람들에게 번역은 낭만적일 수 있겠어요.
사실 번역은 그리 낭만적이지 않습니다. 저는 번역의 90%는 기계적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 굉장히 건방진 말이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기계적’인 대응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예를 들어 같은 목수라도 누구의 손놀림인지에 따라 작품에서 그동안 쌓아온 경력과 숙련도가 드러납니다. 이런 부분을 기계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사실 아무나 그렇게 하지는 못할 겁니다. 잘해서가 아니라 해봤기 때문에, 그 길을 가봤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겠지요.
길을 걸어갈 때 의식하지 않고 걷는 것과 같지 않을까 싶어요. 아기들은 걸을 때 걸음 하나하나 굉장히 의식하면서 걷잖아요. 뒤뚱뒤뚱하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고. 그런데 어른들은 의식하지 않은 채 길의 상황과 조건에 맞춰 넘어지지 않고 걸어갑니다. ‘내가 언제 여기까지 왔지.’라며 다 걸은 뒤에 생각하곤 하지요. 운전도 비슷해요. 초보 운전자는 조금만 운전해도 긴장하고 땀 흘리고 모든 걸 의식합니다. 하지만 경험이 쌓이고 길이 익숙해지고 운전에 능숙해지면 졸리기까지 하잖아요. 번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번역을 하기도 하고, 졸며 하기도 하고, 그럴 때는 내가 진짜 했나 싶을 만큼 전혀 그 과정을 기억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태욱 님의 마음에 가장 오래도록 남아 있는 작가와 문장이 있나요?
그때그때 다른 것 같습니다. 가라타니 고진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지만 아무래도 제게 가장 중요한 작가는 나쓰메 소세키인 것 같습니다. 마음에 오래 남아 있는 문장은, 당장은 기억나지 않지만, 나쓰메 소세키 전집의 표지나 뒤표지에 있는 문장들도 아마 거기에 해당할 겁니다. 제가 고른 것들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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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 “무사태평하게 보이는 이들도 마음속 깊은 곳을 두드려보면 어딘가 슬픈 소리가 난다.” (나쓰메 소세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현암사, 2013),
- “잠들어 있는 천지에 봄에서 뽑아낸 진한 자줏빛 한 점을 선명하게 떨어뜨려놓은 것 같은 여자” (나쓰메 소세키, 『우미인초』, 현암사, 2013)
- “두드려도 소용없다. 혼자 열고 들어오라” (나쓰메 소세키, 『문』, 현암사,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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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책을 번역하면서 외국어와 모어의 경계가 흐려지지는 않았나요?
외국어와 모어의 경계가 흐려지기보다 오히려 경계가 아주 뚜렷하게 보이고 의식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평소엔 ‘다르다’ ‘소통이 안 된다’ 정도지만 번역을 할 땐 한국어에 없는 것들이 보이거든요. 외국에 나가면 우리나라를 생각하게 되는 것과 비슷하겠지요. ‘우리에겐 이런 게 있는데 여기엔 없네.’라며 한국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한국어, 아니 언어 자체가 불투명하고 뚜렷하지 않고 모호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한국어를 일상에서 사용하는 우리는 온갖 단어와 문장을 별로 의식하지 않고 한 덩어리로 쓰윽 이해하니까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그런데 번역은 그 덩어리를 세밀하게 나눠서 재조립하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한국어가 명징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익숙하기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불완전하고 구멍이 숭숭 뚫려 있어서 다른 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소지가 굉장히 많습니다. 하지만 익숙하면 의심의 여지없이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번역 과정에서 문장을 어떻게 읽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문장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차이가 한국어 문장에서 굉장히 많이 보이게 됩니다. 만약 일본어가 모어였다면 일본어에 익숙해서 이렇게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예를 들어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해석해도 전혀 무리가 없는 문장이 있는데, 사실 누구도 그렇게 읽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대로 해석하기 때문이죠. 그럴 때 말이란 것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을 많이 느낍니다.
번역하신 책 중에 가장 마음에 든 한글 서체는 무엇인가요? 책으로 말씀해 주셔도 좋아요.
현암사에서 나온 『책으로 가는 문』(현암사, 2013)이 정말 좋았습니다. 종이의 질감 때문인지, 여백 때문인지, 서체 때문인지 한글이 참 예쁘게 느껴졌습니다. 구성도 편집의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 같았어요. 저는 변화무쌍한 편집보다 차분하고 단순한 편집이 좋습니다. 물론 현암사의 나쓰메 소세키 전집 표지는 시안을 보자마자 제가 생각하던 것이 이런 것이었다고 느꼈을 정도로 마음에 들었습니다. 디자인을 한 나윤영 씨에게는 직접 그런 감상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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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 『책으로 가는 문』 (현암사, 20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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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이 아닌 취향에 따라 읽은 책이 있나요?
책을 워낙 안 읽습니다. 맨날 드라마와 영화만 보는 것 같습니다. 넷플릭스에 올라온 것 중에서 〈멜로가 체질〉(2019)이라는 드라마는 정말 세계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요. 그보다 뛰어난 드라마는 많이 보지 못했거든요. 그리고 〈나의 아저씨〉(2018)와 〈미스터 션샤인〉(2018)도 좋았습니다. 역사를 알기 위해 드라마를 보지 않듯 역사를 검증한다는 눈으로 볼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민족주의적 경향도 생각할 필요 없고, 그냥 드라마로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표현과 영상미가 너무 좋습니다. 그리고 천우희, 김태리 팬입니다. 〈우리들의 블루스〉(2022)의 이병헌은 거장의 경지에 오른 것 같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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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고전이라고 여기는 소설들을 읽으면서 명문이라고 생각하는 문장, 최근 한국 드라마를 시청하면서 밑줄 긋고 싶은 문장, 어느 쪽 문장이 더 많았는가 생각해 보면 드라마에 훨씬 많은 것 같습니다. 예전엔 대중적인 장르가 소설이었지만 오늘날의 대중적인 장르는 드라마, 영화, 웹툰 등일 겁니다. 제 안에 문학예술 장르의 암묵적인 등급 같은 게 있다면 소설이 맨 위에 자리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위치를 재조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번역은 외국어를 한국어로 옮기는 작업인 만큼 많은 사람이 번역가는 외국어에 능통해야 하는 직업이라고만 생각하지만, 사실 번역은 외국어보다도 한국어와 더 가까워야 하는 직업 같습니다. 번역가님의 한국어와의 관계, 그리고 외국어와의 관계는 어떤가요?
이 질문은, 외국어는 굉장히 중요하게 여겨지는 반면에 한국어는 소홀하게 취급되는 경향이 있다는 전제가 깔린 질문 같습니다. 그러니까 외국어 못지않게 한국어 실력도 중요하다는 걸 강조하고 싶은 것이지요. 그렇다고 외국어보다 한국어 실력이 더 중요하다는 식의 이야기까지 가면 안 되겠지요.
당연히 외국어 실력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외국어를 잘한다고 해서 번역까지 잘한다고 말할 순 없습니다. 좋은 번역을 하려면 외국어 실력이 뒷받침돼야 합니다. 특히 문학작품은 그게 안 되면 힘들 겁니다. 정보를 다루는 글은 사전을 찾아보면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지만 분위기나 어감 등의 요소가 중요한 문학작품은 외국어 실력이 좋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외국어 실력이 좋다고 해서 좋은 번역이 되느냐, 그건 절대 아닐 겁니다. 한국어에 대한 어감은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너무 달라서 오히려 그런 어감 차이에 예민한 사람일수록 유리할 것입니다. 어미 하나를 붙일 때도 두 사람의 관계 또는 복잡한 상황을 표현할 수 있는 거니까요. 어떤 단어에 대한 각자만의 인상도 자기도 모르게 번역에 반영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예전에 소세키 작품을 할 때인데 ‘산보(散步)’를 ‘산보’라고 번역했는데 편집자는 ‘산책’을 제안했던 적이 있습니다. 세대 차이라고 생각하는데, 요즘 2-30대는 전혀 쓰지 않는 말이기에 당연히 ‘산책’이 더 익숙하겠지요. 그런데 1900년대 초 작품에서 ‘산책’이라고 해버리면 상당히 근대적인 행위 같은 느낌이 들어요. ‘산보’라고 하면 정해진 코스도 없고 느긋할 것 같고, 아무튼 근대적일 것 같진 않습니다. 산책 코스는 말이 되지만 산보 코스는 좀 어색한 것처럼요. 산보 쪽에는 그런 식의 다소 고리타분한 ‘냄새’가 있거든요. 그래서 평소와 다르게 이 단어만큼은 양보하지 못했어요. 저는 번역의 결과를 책임져야 하고, 이런 요소 하나하나가 작품의 분위기를 결정하는 굉장히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숙집’과 ‘하숙’을 예로 들 수도 있겠네요. 제 독서 경험으로는 하숙을 나온 것과 하숙집을 나온 것은 굉장히 달라요. ‘숙’과 ‘집’이 동어반복이라서 피해야 된다고도 하지만, 저는 아무리 봐도 ‘하숙집’은 우리나라에서 60년대 이후 서울로 유학 온 하숙생들이 묵는 집 같아요. 반면에 2-30년대의 ‘하숙’에는 하숙집의 ‘냄새’가 안 나요. 요즘 나오는 작품들에서도 의식적으로 옛날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 이상 이런 말을 쓰지는 않을 겁니다. 고학생은 하숙보다는 하숙집에 어울리는 그런 느낌이 어디서 온 것인지 모르겠지만 분명히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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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말에 대한 감각은 번역가에게 필요한 한국어 능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슬리퍼는 보송보송하고 실내에서만 사용해야 할 것 같지만 쓰레빠는 물에 젖어도 되고 동네에서 찍찍 끌고 다녀야 할 것 같습니다. 방에 쓰레빠를 신고 들어가면 안 되겠지요. 샐러드는 발사믹 식초와 올리브유가 뿌려진 음식 같지만 사라다는 감자, 계란, 사과가 마요네즈에 섞여 있어야 할 것 같은 그런 거지요. 사전에 같이 올라 있다고 해서 같은 단어가 아닌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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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안팎』은 어떠셨나요? 크든 작든 『안팎』은 여러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안팎』에서 대화를 나눌 만한 사람이 있다면 언제든 말씀해주세요. 『안팎』은 언제나 여러분의 관심을 기다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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