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이 기억하는 처음이 있나요? “처음이란 항상 존재한다. 모든 게 새롭고,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순간만이 진정한 마법과 기적을 선사한다.”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를 쓴 미국의 소설가 F. 스콧 피츠제럴드(Francis Scott Key Fitzgerald)의 말입니다. 처음은 그 대상이 무엇이든 그저 처음인 까닭에 누구에게나 특별합니다. 처음은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는 동시에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여행 티켓을 약속합니다. 이따금 처음이 불안과 긴장을 유발하기도 하지만, 처음이 우리의 생활을 풍부하게 만들고, 나아가 우리 자신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만큼은 분명하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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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럴 슐스트
1988년에 태어난 로럴 슐스트(Laurel Schwulst)는 미국 뉴욕을 기반으로 예술가, 디자이너, 작가, 교육자 등으로 활동하며 크리에이티브 디렉팅을 비롯해 ‘체험적 세계로서의 프로젝트’, ‘확장된 글쓰기’ 등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워크숍 등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뉴욕 타임스』(New York Times), 『크리에이티브 인디펜던트』(The Creative Independent, TCI), 『아트 인 아메리카』(Art in America) 등 여러 매체에 게재된 그의 작품은 에세이, 향수 리뷰, 인터뷰 등의 형태를 취한다. 예일 대학교, 프린스턴 대학교 등에서 인터랙티브 디자인을 가르치며 BBC 라디오 4, RISD, 서울시립대학교, 구글, 위키백과 등 문화, 학술, 인터넷 관련 기관에서 강연했다. 2023년 현재 그는 자신의 공공 두뇌를 호스팅하는 네트워크 큐레이션 플랫폼인 아레나(Are.na)의 기프트샵 디렉터이자 점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인터넷의 PBS(Public Broadcasting Service)’를 위해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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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1988년에 태어나 또래보다 조금 일찍 컴퓨터와 월드 와이드 웹을 접했습니다. 가정 환경 때문이나요? 아니면 우연이었나요?
저는 1988년에 태어났어요. 미국 중서부 일리노이의 ‘노멀’(Normal)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자랐죠. 옥수수밭이 넓게 펼쳐진 단순한 곳이에요. 집 근처에는 숲이 있었고요. 사실 좀 지루한 곳이어서 호기심을 발휘할 수밖에 없었어요. 부모님은 보험 회사에서 일하셨는데, 제가 관심 있는 건 무엇이든 탐구해보라고 격려해주셨죠.
저는 제가 태어난 해인 1988년에 관해 조사하는 걸 좋아해요. 1988년에는 서울에서 제24회 하계 올림픽이 열리고, 최장 수중 해저 터널이 개통되고, 이탈로 칼비노(Italo Calvino)의 마지막 강연인 『다음 천년을 위한 여섯 가지 메모』(Six Memos for the Next Millennium)가 출간됐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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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천년을 위한 여섯 가지 메모』(Six Memos for the Next Millenniu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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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에 발표한 글에서 당신은 웹사이트를 “지식의 강을 따라 흐르는 집”으로 규정했죠. 이 생각은 어디서 나왔고, 지식의 강은 어디로 흐르며, 그 집에는 누가 살고 있나요?
“지식의 강을 따라 흐르는 집”은 제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하며 만든 『크레에이티브 인디펜던트』(The Creative Independent, TCI)입니다. 이 웹사이트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떠올린 생각이죠. 전 세계의 예술가들과 창작 과정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웹사이트가 그 자체로 또 다른 예술가로서 계속 학습하고, 성장하고, 변화하고, 진화할 수 없을까? 매일 웹사이트에 소개되는 대화를 통해 알게 되는 새로운 지식이 웹사이트를 계속 변화시킬 수 없을까? 이 웹사이트는 지식을 연구하는 실험실이고, 그 건축가는 지식인 셈이죠.
이런 생각을 떠올리는 데 영감을 준 작품이 두 점 있어요. 하나는 줄리아 카메론(Julia Cameron)의 『예술가의 길』(The Artist's Way)입니다. 창작과 관련한 자기 계발서인데, 이 책에서 그는 예술가의 길을 원형 또는 나선형으로 설명해요. 왜 하필 나선형일까요? 나선형은 시간이 지나면서 핵심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하고, 이는 모든 예술가들이 작품을 만들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죠. “매번 다른 단계에서 몇 가지 문제가 돌고 돕니다. 예술가의 삶에서 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단계에는 좌절과 보상이 존재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길을 찾는 것, 그리고 발판을 마련해 등반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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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웹을 매체 삼아 작가로도 활동하죠.
작가로서 저는 사물의 이름과 정의에 관심이 많아요. 최근에 마음에 드는 디자인에 관한 정의가 있어요. 제게 디자인은 프로젝트가 자연스럽게 노래할 수 있도록 입구와 출구를 만드는 일입니다. 여기서 ‘노래’는 누군가 프로젝트에 생생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드는 요소일 수도 있죠. 출입구를 만들면 전체적인 시스템과 최적의 흐름이 만들어지곤 해요. 그렇게 시스템이 활성화하는 거죠.
사람들은 흔히 컴퓨터와 인터넷 같은 것만이 기술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글쓰기도 기술이죠. 우리 주변에 있는 전기도 기술이고요. 제가 기술에 관심이 많은 건 기술이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 특히 한국에 있는 당신처럼 당장 내 곁에 없는 사람들과 저를 연결해주기 때문이에요. 기술이 없었다면 우리는 만날 수 없었겠죠. 특히 컴퓨터와 인터넷은 모든 것을 날렵하고 빠르게 연결합니다. 잘만 활용하면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마법사가 된 기분이죠. 따라서 기술을 잘 활용하려면 그 만한 책임감이 따를 수밖에 없고요.
당신 작업에서는 자연에서 비롯한 은유가 도드라집니다. 어린 시절 경험한 자연이 오늘날 작업에 어떻게 반영되나요?
저는 기술을 이용한 작업에서 은유에 관해 많이 생각하는 편이에요. TCI의 나선형과 달팽이처럼 자연에 기반한 은유가 많죠. 2021년 『뉴욕 타임즈』(The New York Times)에 소개한 「연 만들기」에서는 ‘바람’에 관해 이야기했어요.
- 바람은 잠시 왔다가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주변과 환경에 실질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삶의 모든 힘에 관한 중요한 은유를 제공합니다.
- 오늘날 인터넷은 현대적인 바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미묘한 바람에도 쉽게 휩쓸리거나 하늘을 뚫고 올라갈 수 있습니다. 이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영향은 우리 주변에서 점점 더 뚜렷하게 느껴집니다.
- 스마트폰과 네트워크 기능을 갖춘 생활 사물이 점점 더 많아지면서 이 바람은 이따금 혼란스러울 만큼 우리의 주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수천 년의 역사를 지닌 연과 달리 인터넷이 탑재된 컴퓨터는 비교적 최근에 개발된 기술이기 때문에 더 많은 진화가 필요합니다.
- 제가 자주 언급하는 또 다른 디자인 철학은 ‘차분한 기술’입니다. 차분함을 오늘날 컴퓨터를 사용하는 모든 디자인에 대한 근본적인 과제로 선언한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사용자의 주의를 분산시키지 않고 정보를 전달할 수 있을까요? 물론 모든 기술이 차분할 필요는 없지만, 오늘날 너무 많은 디자인이 한 가지에 집중하면서 맥락, 환경, 나머지 주변을 조명할 수 있는 기회를 소홀히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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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뉴욕 타임즈』(The New York Times)에 소개한 「연 만들기」 |
2021년 『뉴욕 타임즈』(The New York Times)에 소개한 「연 만들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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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나 뉴스레터처럼 글쓰기 또한 당신 작업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저는 디자이너라면, 아니 현대인이라면 글쓰기를 더 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글쓰기가 당신의 다른 작업에 어떤 영향을 미치나요?
글쓰기는 뭔가를 생각할 수 있는 공간뿐 아니라 시간을 얻는 놀라운 기회입니다. 저는 글쓰기가 강연과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말 그대로 손이나 키보드로 글을 쓰는 행위보다 뭔가에 관해 생각하고 이야기한다는 점이 더 중요하거든요. 그런 점에서 이 대화 또한 글쓰기이자 강연인 셈이죠. 이 대화 이후에 제가 어떻게 달라질지 궁금해져요.
이따금 강연에서 특정 프로젝트, 즉 새로움이 탄생하기도 해요. 예컨대 2018년 뉴욕의 시적 연산 학교(School for Poetic Computation, SFPC)에서 ‘피어 투 피어 웹’(Peer to Peer Web)에 관한 강연을 요청받았어요. 당시 저는 (지금은 사라졌지만) ‘비커 브라우저’(Beaker Browser)라는 P2P 기반 웹 브라우저에 대한 기대가 컸어요. 한 달 정도 강연을 준비하면서 저는 비커 브라우저 전용 블로그를 운영하고, 강연에서 그 결과를 공유했죠. 그렇게 강연에서 새로움이 만들어졌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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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져 결국 사라지려는 생각을 글자로 연결하지 않으면 이 대화도 이뤄지지 않겠죠. 한편, 우리는 수많은 ‘처음’과 마주합니다. 이 대화 또한 당신뿐 아니라 제게도 ‘처음’이죠. 당신의 오늘은 어떤 ‘처음’으로 이뤄지나요? 내일은요?
낙관적인 어떤 사람들은 매일 아침이 새롭다고 말하곤 하지만, 저는 그건 좀 과욕인 것 같아요. 저만 해도 매일 새로움을 느끼지 못할 때가 많거든요. 대신 저는 ‘계절’이나 ‘여행’이라는 개념을 좋아해요. 특히 계절은 하루보다 조금 더 길고 지구에 묶여 있죠. 저는 ‘계절마다’ 또는 ‘여행할 때마다’ 새롭다고 느껴요.
계절에 관해 조금 더 부연하면, 제가 발행하는 『돔에서의 또 다른 하루』(Another Day in the Dome)라는 뉴스레터가 첫 번째 계절을 맞이하고 있어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발행하는데, 이번 가을에는 오랜만에 강의를 쉬는 터라 매주 뉴스레터를 발행하는 게 꼭 강의를 하는 것 같기도 해요. 다음 계절에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돔 투 돔’(Dome to Dome)이라는 새로운 코너를 시작하고 싶은데, 거기서 이 대화를 다시 소개하면 어떨까요? 『안팎』의 돔에서 저의 돔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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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럴 슐스트의 뉴스레터 『돔에서의 또 다른 하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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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화에서 우리가 놓친 ‘처음’이 있을까요? 마지막 ‘처음’으로서요.
당신을 처음 만난 2016년 여름이 떠올라요. 뉴욕의 한 서점에서 만나 차이나타운에서 수박 주스를 함께 마셨죠. 제게는 정말 아름다운 추억이에요. 기술, 디자인, 그리고 말이나 글로 정의할 수 없는 뭔가를 향한 공통된 관심사 덕 아닐까요? 이 대화도 마찬가지일 테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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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안팎』은 어떠셨나요? 크든 작든 『안팎』은 여러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안팎』에서 대화를 나눌 만한 사람이 있다면 언제든 말씀해주세요. 『안팎』은 언제나 여러분의 관심을 기다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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